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Antoine Laurent de Jussieu, 1748-1836)는 프랑스의 식물학자로, 자연 분류 체계의 선구자이다. 그는 1770년 파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7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89년 저서 "식물속(Genera plantarum)"을 통해 린네의 인위적인 분류 체계를 대체하는 자연 분류 체계를 제시했다. 쥐시외는 프랑스 혁명 시기 파리 시 정부에서 일하며 병원을 관리했고, 나폴레옹에 의해 대학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분류 체계는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현재에도 많은 식물 과(科)들이 그의 업적에 기인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식물학자 - 아르망 다비드
아르망 다비드는 중국에서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여 자이언트판다와 다비드사슴을 서양에 알리는 등 동물학 및 식물학에 공헌한 프랑스 선교사이자 박물학자이다. - 프랑스의 식물학자 - 에밀 타케
프랑스 신부이자 식물 수집가인 에밀 타케는 55년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제주도에서 식물 채집에 힘썼고, 제주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유럽 학계에 보고하고 온주밀감 묘목을 들여와 제주 감귤 산업의 시초를 마련했으며, 그의 식물 표본은 전 세계 식물 연구에 기여했고 그의 이름을 딴 식물도 있다. - 아홉 자매회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정치가, 과학자, 발명가, 작가, 출판인, 외교관으로서 미국 독립 선언문 초안 작성,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 체결, 피뢰침과 프랭클린 스토브 발명, 전기에 대한 연구,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출판, 사회 개혁 활동, 필라델피아 도서관 설립, 미국 헌법 제정 참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며 미국 건국과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아홉 자매회 - 볼테르
볼테르는 이성, 자유, 관용을 옹호하며 종교적 불관용과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프랑스 사회 개혁을 촉구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작가, 역사가이다. - 1748년 출생 - 제러미 벤담
영국의 법철학자이자 사회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법 개혁과 사회 개혁에 헌신하며 공리주의를 체계화하고 판옵티콘 감옥 모델을 제안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1748년 출생 - 올랭프 드 구주
프랑스 혁명 시대 작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촉구하고 노예제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했다.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 |
출생 | 1748년 4월 12일, 리옹, 프랑스 왕국 |
사망 | 1836년 9월 17일 (88세), 파리, 프랑스 왕국 |
국적 | 프랑스 |
분야 | 식물학 |
근무 기관 | 파리 식물원, 프랑스 국립 자연사 박물관 |
알려진 업적 | 현화식물 분류 |
약칭 (식물학) | Juss. |
가족 | |
자녀 | 아드리앙-앙리 드 쥐시외 (아들) |
친척 | 앙투안 드 쥐시외 (삼촌) 베르나르 드 쥐시외 (삼촌) 조제프 드 쥐시외 (삼촌) |
2. 삶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는 1748년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식물학에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버지와 세 삼촌 모두 식물학자였다. 1765년, 삼촌 베르나르 드 쥐시외와 함께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고, 1770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식물원에서 식물학 강사로 일했으며, 1773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89년, 쥐시외는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에 주요 저서 ''Genera plantarum''(식물속)을 출판했다. 그는 혁명 원칙을 지지하여 파리 시 정부에서 일하며 병원 관리를 맡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대학 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쥐시외는 왕립식물원을 자연사 박물관으로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표본실(herbarium) 설립에 기여했다. 1826년, 박물관에서 은퇴하고 아들 아드리앙 앙리 드 쥐시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2. 1. 가문과 초기 생애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는 1748년 프랑스 리옹에서 아마추어 식물학자의 10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세 남동생도 식물학자였다. 그는 1765년에 삼촌 베르나르와 함께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고, 1770년에 생리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773년 과학 아카데미에서 미나리아재비과의 분류에 관한 강의를 듣고 그해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 2. 학문적 업적
쥐시외의 식물 분류 체계는 식물 특징의 상대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으며, 자연 분류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체계는 1773년 미나리아재비과에 관한 논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이듬해 그는 왕립 정원(Jardin de Roi)의 식물 배열에 관한 논문에서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는 베르사유 트리아농 정원에서 그의 삼촌 베르나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주로 상과(suprafamilial) 계급의 분류에 중점을 두었다. 그 후 5년 동안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식물계 전체에 적용하는 데 전념했고, 마침내 그의 획기적인 저서인 『식물속(Genera plantarum)』(1789)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저서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식물표본실과 식물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과 독일의 식물학자들이 린네 체계의 확고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급진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경계했지만, 이 저서는 곧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로버트 브라운과 A. P. 드 칸돌을 포함한 저명한 식물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홍보되었다.
『식물속(Genera plantarum)』(1789)에서 쥐시외는 자연주의자 미셸 아단송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인 여러 가지 특징을 사용하여 그룹을 정의하는 방법론을 채택했다. 이는 린네의 "인위적" 체계보다 상당한 발전이었는데, 린네는 수술과 암술의 수에 따라 식물을 강과 목으로 분류했지만, 쥐시외는 린네의 이명법을 유지했다. 그는 식물 특징의 가치에 대한 삼촌의 생각을 확장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불균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계층적 시스템에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하위에 속했다. 쥐시외의 말처럼, 식물의 특징은 각각을 특정 그룹에 할당할 때 "pesés et non comptés"(무게를 달아야지, 세서는 안 된다)야 한다. 그가 삼촌의 세 가지 주요 그룹에 붙인 이름은 속씨식물(Acotyledon), 외떡잎식물(Monocotyledon), 쌍떡잎식물(Dicotyledon)이었다. 이들은 다시 15개의 강과 100개의 과로 나뉘었다.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룹으로의 분류와 100개의 과 (''ordines naturales'')의 설명과 범위 설정이다. 박물관에서 과학 연구를 재개하면서 쥐시외의 출판물(약 60편의 논문)은 주로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그가 명명한 과들을 더 자세히 범위 설정하고 설명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작업은 요제프 괴르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두 번째 판을 작업했지만, 출판된 것은 그의 『서론(Introductio)』뿐이었고, 그것은 1837년 사후에 출판되었다.
1774년에 베르나르 드 쥐시외의 사상을 발전시켜 형태에 따른 새로운 분류 체계를 발표했지만, 완성까지는 15년이 더 걸렸다. 그 이전의 린네의 분류는 수술과 암술의 수에 따라 식물을 분류했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 쥐시외의 분류 체계는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 후의 현화식물 분류의 모든 기초가 되었다. 저서 『식물의 속(植物の属)』에 대해 퀴비에는 실험 과학에서 라부아지에의 업적에 필적하는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칭찬했지만, 쥐시외 자신도 퀴비에와 캉돌의 업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 3. 프랑스 혁명과 이후의 활동
1789년 쥐시외의 ''Genera plantarum''이 출판된 후 프랑스 혁명(1789-1799)이 일어났다. 그는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고 파리 시 정부의 직위에 임명되어 모든 병원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1808년 나폴레옹은 그를 대학의 고문으로 임명했다.왕정이 전복되면서 왕립식물원(Jardin du Roi)은 식물원(Jardin des plantes)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쥐시외는 1790년에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으로 왕립식물원을 재편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야외 식물학(Botanique à la campagne) 분야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794년부터 1795년까지, 그리고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박물관 관장을 역임했다. 쥐시외는 즉시 표본실(herbarium)을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은 혁명군에 의한 외국 소장품 압수와 교회와 귀족 자산 몰수로 크게 촉진되었다.
그는 1826년까지 박물관에 남아 있었고, 그의 아들 아드리앙 앙리 드 쥐시외가 계승했다. 박물관에서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3. 작업
쥐시외는 1773년 미나리아재비과에 관한 논문을 통해 식물 분류 체계를 처음 발표했고, 그랑 트리아농 정원에서 숙부의 작업을 바탕으로 식물 배열에 관한 논문을 통해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1789년에는 여러 성질을 사용하여 그룹을 정의하는 방법론을 담은 저서 ''Genera plantarum''(Genera plantarum|식물속la)을 출판했다.
3. 1. 쥐시외의 식물 분류 체계
쥐시외의 식물 분류 체계는 식물 특징의 상대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으며, 자연 분류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체계는 1773년 미나리아재비과에 관한 논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이듬해 그는 왕립 정원(Jardin de Roi)의 식물 배열에 관한 논문에서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는 베르사유 트리아농 정원에서 그의 삼촌 베르나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주로 상과(suprafamilial) 계급의 분류에 중점을 두었다.그 후 5년 동안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식물계 전체에 적용하는 데 전념했고, 마침내 그의 획기적인 저서인 『식물속(Genera plantarum)』(1789)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저서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수많은 식물표본실과 식물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과 독일의 식물학자들이 린네 체계의 확고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급진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경계했지만, 이 저서는 곧 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로버트 브라운과 A. P. 드 칸돌을 포함한 저명한 식물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홍보되었다.
『식물속(Genera plantarum)』(1789)에서 쥐시외는 미셸 아단송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인 여러 가지 특징을 사용하여 그룹을 정의하는 방법론을 채택했다. 이는 린네의 "인위적" 체계보다 상당한 발전이었는데, 린네는 수술과 암술의 수에 따라 식물을 강과 목으로 분류했지만, 쥐시외는 린네의 이명법을 유지했다. 그는 식물 특징의 가치에 대한 삼촌의 생각을 확장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불균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계층적 시스템에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하위에 속했다. 쥐시외의 말처럼, 식물의 특징은 각각을 특정 그룹에 할당할 때 "pesés et non comptés"(무게를 달아야지, 세서는 안 된다)야 한다. 그가 삼촌의 세 가지 주요 그룹에 붙인 이름은 속씨식물(Acotyledon), 외떡잎식물(Monocotyledon), 쌍떡잎식물(Dicotyledon)이었다. 이들은 다시 15개의 강과 100개의 과로 나뉘었다.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룹으로의 분류와 100개의 과 (''ordines naturales'')의 설명과 범위 설정이다.

박물관에서 과학 연구를 재개하면서 쥐시외의 출판물(약 60편의 논문)은 주로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그가 명명한 과들을 더 자세히 범위 설정하고 설명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작업은 요제프 괴르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식물속(Genera plantarum)』의 두 번째 판을 작업했지만, 출판된 것은 그의 『서론(Introductio)』뿐이었고, 그것은 1837년 사후에 출판되었다.
3. 2. 주요 저서
wikitext연도 | 제목 | 비고 |
---|---|---|
1773 | 미나리아재비과에 대한 검토 | |
1774 | 왕립 정원의 강의에서 채택된 새로운 식물 질서에 대한 설명 | |
1789 | Genera plantarum|식물속la | 1774년 파리 왕립 정원에서 작성된 방법에 따라 자연 질서에 따라 배열 |
1804 | 극단의 식물 속에 대한 논문 | |
1810 | 가지과, 지치과, 메꽃과, 극단과, 능소화과, 용담과, 협죽도과, 감나무과, 자금우과에 추가하거나 제거할 식물 속에 대한 논문 | |
1824 | 식물의 자연 방법 원리 | |
1837 | 식물 역사 소개 | 사후 출판 |
1802-1808 | 자연사 박물관에 관한 역사적 고지 | 자연사 박물관 연보에 수록 |
4. 유산 및 평가
쥐시외의 자연 분류 체계는 린네의 인위적인 성적 분류 체계를 빠르게 대체하였다. 1789년 8월 4일, ''Genera Plantarum(Gen. Pl.)''의 출판과 함께 식물학에서 속(屬) 상위 분류 명명법 체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Genera plantarum''은 그 영향력이 매우 커서, 현재의 많은 식물 과들이 여전히 쥐시외에게서 기원한다. 모튼의 1981년 저서 ''식물학의 역사''에 따르면, 린네는 단 11개의 과(科)만을 ICBN에 보존한 반면, 쥐시외는 76개의 과를 보존하였다. 시드니 하워드 바인즈는 자연 분류 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위대한 업적의 영광은 쥐시외에게 돌아간다. 그는 정확히 심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 유능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사람들이 과학의 모든 위대한 일반화를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다."
드 쥐시외와 그의 가족은 흉상과 메달(피에르-장 다비드가 제작)을 포함한 여러 이미지로 기념되었다. 1842년 장-프랑수아 르장드르-에랄이 10000FRF으로 의뢰한 쥐시외의 동상은 식물원의 식물학 갤러리에 있다. 또 다른 동상은 장-바티스트 귀스타브 드로이가 제작했으며,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의 난간( 마리아-테레지엔 광장을 마주보고)에 있다. 쥐시외 식물학 가문은 식물원 인근의 쥐시외 광장((생빅토르 지역, 5구), 쥐시외 거리, 쥐시외 지하철역, 그리고 파리 대학교의 쥐시외 과학 캠퍼스를 통해 기념되고 있다. 쥐시외 가족은 가족의 고향인 마르세이유와 리옹의 거리 이름에도 기념되고 있다. 호주의 쥐시외 반도와 한 소행성도 앙투안 로랑 드 쥐시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